슈안투가 진원의 고국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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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몇몇 니샤오 같은 평론가들은 <<슈안투(현도)가 친본의 고국이었다>>라고한다. 같은 지역에, 그러니까 친본이 있었던 지역에 차 부족도 존재했었다.
차부족과 친본의 수도는 문헌적으로 기록된건 없지만 촤나니지역에서 7640리 떨어져 있었다.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차부족은 바닷가 근처였을 것이다. 그러므로 <<한슈>>에 기록된건 실수라고 볼 수 있다. 이에대해 일본 역사학자 나카는 <<차부족은 압록강위에 위치했었고 차나니까지의 거리인 7640리는 과장된것으로 보인다. 아마 여기서의 7000리는 약 5000리를 뜻할것이다.>>라고 했다.
게다가 <<칸시 쯰쟌>>촤얀이 라오둔지역에 위치했다고 한다. 아마 촤샨 산과 관련이 있을것이다. 아마 촤부족도 여기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다. 이 지역은 난난군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. 그래서 이러한 인용구가 친본이 압록강 상류에 위치했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. 부족들 가운데 친본의 윗지방에서 테반이라는 군이 만들어졌다. 촤부족까지 일곱개의 부족이었고, 테반 부족이 생기면서 총 여덟개의 부족이 백제로 편입된다. 안타깝게도 <<한슈>>엔 위에 언급된 명칭이 촤부족을 제외하곤 없다.
구체적으로 친본의 올바른 국경은 <<만주 지역 지리지>>에 나온다 : <<친본의 동쪽 경계는 개마고원 아니면 산에서 시작되고 오래된 지방을 분수령으로 삼는다(차간과 얀간지방)평안과 함경같은 오래된 지방. 친본의 영토는 옥저와 초기 현도군의 영토와 관계가 있다. 남쪽에 찬성의 경계 – 천현 (함흥근처)는 난난군의 경계와 맞닿는다. 북쪽 분수령으론 압록강과 훈쟌, 수즤헤, 훈헤와 순가리강에 맞닿고 부여와 경계를 같이 한다. 남쪽으론 대략적으로 구안코우(푸슈니에서 서쪽으로)-쥴랸천 가 랴오군둔과 경계를 같이한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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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런 이론으로 친본의 위치를 이끌어 낼 수 있다.
최초엔 조선의 북쪽에 위치했다고 했고, 싀삔, 푸슌, 툰후아 산맥 사이에 위치했다고 했다. 이어서 친본이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(현도군에 의해서)친본의 영토는 현도군의 것이 되었다. 이 때부터 현도군이 이 지방을 관리했다. 이전부터 현도군의 백성과 친본의 백성이 서로 섞여있던 것일 수도 있다. 아마 서도 같은 지역을 다르게 불렀을 수도 있다. 예를 들어 고구려의 침입을 받고 현도군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영토는 가이유안과 타이안 산맥 사이에있었고 타즤헤와 툰쟌쟌 강 사이에 분수령을 두었었다. 이 지역은 일찍이부터 역사서에 나와있다. 이 지역은 <<쉬찌>>에 서술되어 있다. : <<챠오샨의 영향력은(기원전 7세기경) 휴안투와 렐란의 영토에까지 미쳤다 >>.
앞서 언급되었듯이 친본군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동안 유지되었다. 기원전 108년에 세워져서 기원전 82년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. 이후 한나라의 통치를 받았다. 케이. 시라토리는 이에대해 <<친본은 침략당한 후 완전히 정부가 해체되었고 국민들은 힘든 관리를 받았다. >>라고 말했다. 다르게 말하면 한나라는 이 지역을 성공적으로 다루지 못했다.
#2 임둔
처음엔 임둔군의 위치가 꽤나 뚜렷해보였다. –한국 북쪽 지역의 칸본지방 – 그래서 친본지역과 국경을 마주할거라는 이론과 상충되었다.